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은?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세상에서 박해를 받아야 하는데. 예수님을 따르지 않아서, 복음을 살지 않아서, 세상에서 무시와 비난을 받는다면. 그저 내 ‘마음 편한’걸로 끝이라면, 그곳은 천국일까? 우리의 신앙은 무슨 의미일까?

허술함을 기적으로, 끝까지 책임지시는 주님

우리 삶의 허술함, 나약함, 때로는 위기와 같은 순간이. 하느님의 기적이 계시되는 놀라운 통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그런 순간들과 계시를 이어줄 매개체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믿음을 지닌 이들’의 삶이 아닐까. 복음 속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그 삶의 모범을 본다.

지나친 기대와 희망

때론 간절함이, 절박함이, 눈을 가리고 무엇이든 붙잡게 만든다. ‘일단 살고보자’라며. 기다리지 못하고 내 손으로 만들어 낸다. 그래선 안될텐데 깨어있지 못하게 한다.

성가정이란, 예수를 찾아다니는 가정

성가정이란, 가족이 모두 세례를 받은 가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번 복음에서 발견하는 성가정의 예시는, 예수님을 찾아다니는 모습이다.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찾을 때 까지’ 계속 그분을 찾아다닌다. 분명한 건, 그분은 성전. 바로 우리 가운데 계신다. 예수님을 찾아다니지 않는다면, 그분을 우리 안에서 찾아내지 못한다면, 성가정을 지향하는 의미가 또 무엇이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그분은 인간 아기로 오신 것처럼 여전히 비천한 인간 육신으로 오신다. 더럽고 초라하고 보잘것 없는 구유. 나, 바로 나라는 살덩이로 육화되어 오신다. 머물곳이라고는 누추함 뿐인데, 그 마저도 괜찮다시며 내 안에 오신다. 언제쯤 그분께 괜찮은 방 하나 내어 드릴 수 있을까.

대림을 지내며

자격 없는 나를 위해 자격으로 오신 주님. 그분이 자격이 되어주심이 나를 살게 한다. 자격 없는 나이기에, 주님이 간절히 필요하다. 신앙을 한다면서, 고상하게 앉아서 주접을 떨고 앉았도다.

외적인 웅장함

오늘 복음에서, 우리 주님은 최고의 아웃사이더답게 초치는 소리를 하신다. 성전이 예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한테, ‘다 허물어질거다’라니… 속이 꼬여도 단단히 꼬인 사람으로 보였겠지? 허나 아마도,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진 성전, 주님께서는 그 외형에 감탄하길 바라시는게 아니었던거겠지. 본질은 외형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일테니까. 그 아름다움의 목적은 성전을 꾸미기 위함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자랑하기 위함이어야 했다.

이방인으로서의 삶

이것이 현실인지 혹은 나 혼자만의 착각인지 잘 알 수 없지만. 종종 벽같은 것이 느껴질 때가 있다. 노골적으로 차별을 한다거나 하는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동양인인데다 영어까지 못하는 입장에서는 ‘무리’에 낀다는 게 버겁고 때론 벽이 느껴질 때가 있다.

호칭이 나를 대신해줄 순 없다.

그러고보면, 한국에서는 순수한 개인의 존중보다, 역할이나 지위에 따르는 호칭이 굉장히 중요하다. 호칭은 ‘내가 누구인지’를 드러내는데 그것으로 서로 간의 지위를 암묵적으로 인식하고 거기에 맞게 태도를 취한다. 어찌보면, 평등한 인격적 관계는 아닌거다. 심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