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우리는 성사적으로 모두 동등한 ‘등’을 지니고 있다. 내 의지와 노력과 상관 없이 성사적 은총에 의해 등에 불은 늘 켜져있다. 하지만, 때때로 이 놀라운 은총 때문에 착각하곤 한다. ‘음.. 불 잘 켜져있네.. 잘 하고 있구만 그려..’
흰 옷을 입은 무리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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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를 받고 순교를 당하길 꿈꾸던 때가 있었다. 예수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다가 거절 당해서 목숨을 잃어버리는 것이 내 마지막이길 바랬었다. 하지만 정작 선교지에서 질병으로 죽을 수 있는 처지가 되자 영광스러운 죽음은 커녕, 삶에 대한 집착만 있더라.
예수님, 요즘 어때요? 어찌 지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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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온 뒤, 여기서 만난 너무 귀한 인연들이 많다. 원래 알던 분들이지만 더욱 돈독해진 분들도 있고 새롭게 관계를 이어가는 아름다운 분들도 많다. 또 소셜 미디어를 통해 새로운 관계가 된 분들도 많다. 반면에, 한국에서의 관계들 중에는 변화도 많았다. 필요에 의해서만 연락을 하는 사람, 항상 내가 먼저 연락을 해야 소식을 알 수 있는 사람, 반대로 늘 나보다 […]
성경을 잘라서 읽으면, 요리가 달라진다. 쓴맛을 달게 만들고 싶은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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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처지에서도 살 수 있는 비결, 그것이 바로 힘을 주시는 그분 안에서 가능하다는 말씀이다. 내가 원하는 것, 나의 어떤 뜻과 지향을 위해서 힘을 주는 그분 안에서 모든 걸 할 수 있다고 격려를 땡기고 싶지만, 사실 이 구절의 본질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던 아니던, 성공하던 망하던 상관없이 잘 살 수 있는 힘. 그것이 바로 믿음의 삶이라는 것이다. 성경을 잘라서 읽으면 안되는 이유는, 이렇듯이 위로를 만들어 쥐어짜고 싶은 유혹이 있기 때문이다.
낙태가 여성의 권리라니… 파괴가 권리일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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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문제, 성문제. 특히 낙태와 섹스에 관한 문제는, 성직자, 수도자들만 외쳐서 될 일이 아니다. 왜냐면 이미! ‘결혼도 안하는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면서’ 하는 소리로 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꽤 많은 신자들이 ‘신부님들은 결혼을 안하니까 쉽게 생각하고 쉽게 말한다’라며 생명문제를 ‘가정사’, 성문제를 ‘침대에서의 일’ 정도로 치부해 버리고는 하는데… 그래서 생명과 성 문제는 평신도들 특히 결혼한 사람들과 여성들에게 소명의식이 무겁게 요구되는 부분이지 싶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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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이 ‘그게 뭐 대수냐’라고 하더라도 내 아들이 해냈기 때문에 기쁜 일이고, 내 아들이 성공했기 때문에 멋진 일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별 볼일 없는 것이 아니라… 내 아들이 해냈기 때문에 대견 할 뿐이다.
모세와 예언자들이 기록한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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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도, 다른 이에게 나누지 않고 홀로 독점하고 있다면.. 정말 내가 만난, 내가 사랑하는 그분이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바로 그분이 맞는지 진지하게 돌아봐야 한다.
예배를 멈춰도 될까? 강행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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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핫이슈가 되고 있는, ‘예배 강행’에 대한 생각. ‘상황에 대한 고려’는 해야하지만, 본질적으로 나는 이게 옳다고 생각한다. 광적인 종교인 취급을 당할 지 모르지만, 맞는건 맞는거니까. 하느님이 교회에만 계신 것도 아니고 어디서든 계시는데 우리가 꼭 모일 필요는 없지 않냐는 물음을 보면.. 신 존재는 믿지만 종교가 굳이 필요치 않다는 말로 들린다. 물론, 신을 믿지만 교회를 믿지 […]
뙤약볕을 감사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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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라고 말했지만 사실 나는, 나를 위해 일한 것이었다.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만 했다는 건, 나를 위한 수고가 그만큼 힘들었다는 말이었다. 처음의 내 마음, 처음의 그분과의 약속, 그것은 사라지고 온전히 ‘나’만 남아버리니 모든 것이 다 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