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체훼손이라니…

나는 이 사건은 패미니즘과 1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여성인권을 위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광기를 쏟아낼 명분을 멋대로 만들어 냈을 뿐일거다. 그리고 악의 지배 아래에 처절하게 시달리고 있을 거다. 특별히 성체에, 성심에 관한 신심이 광적인 나에겐 더더욱 비통할 일이고 미칠듯 화가 나는 일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두고 똑같이 칼을 드는 것을 보는 것 또한 마음이 아프다. 혐오를 혐오로 해결 할 수는 없다. 똑같은 악이 반복되고 새로 태어날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악이 원하는 일이다.

상처

발등에 상처가 생겼다. 언제 어디에서 다쳤는지 모른다. 워낙 둔해서 내가 다친것도 모르고 있다가 딸내미가 발견해서 알게될 때도 많다. 언제 어디서 무슨 죄를 짓는지, 나 조차도 모르고 사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섬김의 이유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요한 21,15 양을 사랑해서 양을 돌보는 것이 아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어린양들을 돌보는 것이다. 사람들을 위해 봉사한다는 것은..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해서가 아니라, […]

하느님만으로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마르 16,19 주님의 승천은 겸손의 참 표본이다. 그분은, 사람들 앞에 자리하지 않고 하느님 옆에 앉으셨다. 자기의 영광, 자기의 나라, 자기의 역할에 열중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큰 흐름을 따르셨다. 그분은, 자신의 몫에 집착하지 않았고, 자신의 영역을 키우려 하지도 않으셨다. 오히려 허술하기 짝이 없는 ‘부족한 이들’에게 […]

연결

그렇게 주님과 가까이 있고 그분의 기적을 목격하였어도, 떨어져 나갈 수 있는게 우리 연약함이다. ‘설마! 그럴리가 없다!’라는 착각은 오만일지도…

믿음으로

너무나도 오랫동안,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하거나 잃으며 지내왔다고 생각될 때가 아직도 종종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어갈 수 있는 것은, 그동안 내 삶에 보여주셨던 신뢰에 대한 경험 덕분이다.

부활

웅장함이라곤 없는 조그마한 성전이지만, 전례 안에서 선포되는 예수님의 부활과 기념은 인간의 이성과 분위기를 초월합니다. 그래서인지, 오늘 전례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 마음 속에서 이렇게 따끔한 울림을 주셨습니다.

음주성찰

10여년 전.. 묵주팔지를 네다섯개씩 달고 다니던 때가 있었다. 돌아다닐 때마다 묵주를 돌리던 그런 때가 있었다. 지하철을 타면 모르는 아주머니들로부터 젊은 사람이 믿음이 깊다며 칭찬도 자주 들었더랬다. 물론 칭찬을 위해 그러고 다닌건 아니었지만 감사하고 좋았다. 동시에 또 한쪽에서는 험한 소리도 자주 들었다. 신앙이 너무 과하다고…

사도 바오로의 회심 축일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에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게 되는 장면은, 성경의 많은 사건들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예요. 극에서 극이 다리 놓아지는 아름다운 장면… 오래 전 처음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서 이 장면을 마주했을 때 매우 감격했습니다.

별 볼일 없는 이를 부르시는 주님

가난한 집안에 내세울 것 없고, 못 배워 무식한데다, 특출난 능력도 없고.. 게다가 못된 짓은 어려서부터 탁월했던 탓에 죄와 어둠에 참 익숙하고 편안함을 느끼는 나인데… 그런 나를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