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술함을 기적으로, 끝까지 책임지시는 주님

우리 삶의 허술함, 나약함, 때로는 위기와 같은 순간이. 하느님의 기적이 계시되는 놀라운 통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그런 순간들과 계시를 이어줄 매개체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믿음을 지닌 이들’의 삶이 아닐까. 복음 속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그 삶의 모범을 본다.

지나친 기대와 희망

때론 간절함이, 절박함이, 눈을 가리고 무엇이든 붙잡게 만든다. ‘일단 살고보자’라며. 기다리지 못하고 내 손으로 만들어 낸다. 그래선 안될텐데 깨어있지 못하게 한다.

성가정이란, 예수를 찾아다니는 가정

성가정이란, 가족이 모두 세례를 받은 가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번 복음에서 발견하는 성가정의 예시는, 예수님을 찾아다니는 모습이다.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찾을 때 까지’ 계속 그분을 찾아다닌다. 분명한 건, 그분은 성전. 바로 우리 가운데 계신다. 예수님을 찾아다니지 않는다면, 그분을 우리 안에서 찾아내지 못한다면, 성가정을 지향하는 의미가 또 무엇이 있을까!

대림을 지내며

자격 없는 나를 위해 자격으로 오신 주님. 그분이 자격이 되어주심이 나를 살게 한다. 자격 없는 나이기에, 주님이 간절히 필요하다. 신앙을 한다면서, 고상하게 앉아서 주접을 떨고 앉았도다.

외적인 웅장함

오늘 복음에서, 우리 주님은 최고의 아웃사이더답게 초치는 소리를 하신다. 성전이 예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한테, ‘다 허물어질거다’라니… 속이 꼬여도 단단히 꼬인 사람으로 보였겠지? 허나 아마도,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진 성전, 주님께서는 그 외형에 감탄하길 바라시는게 아니었던거겠지. 본질은 외형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일테니까. 그 아름다움의 목적은 성전을 꾸미기 위함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자랑하기 위함이어야 했다.

새로움이라는 유혹

자주 빠지는 유혹이 있다. “뭔가 새로운게 없을까? 더 확실하고 더 나은 무언가가 없을까?” 슬럼프에 빠졌을 때라거나 게으름의 늪에 깊게 빠졌을 때, 나름의 정당성 부여를 위해 새로운 것을 찾으려는 유혹에 쉽게 빠지곤 한다. 오늘 복음은, 지금 또 이런 ‘새로움’을 갈구하고 있는 나에게 명확하게 응답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이 담겨 있다.

계산하지 않고 따름

바르티매오에게서 내 모습을 본다. 어둠에 빠져 눈이 멀어 빛을 볼 수 없었고, 사랑에 굶주린 거지였던 과거의 나. 바르티매오에게 잠자코 있으라 꾸짖은 사람들처럼, 사랑 보다는 비난과 무시 그리고 많은 상처들이 따라 왔었다.

성경 메모

오래전에, 한 형제님이 피정 미사 중에 사람들 앞에서 소감을 발표하며 나를 거론한 적이 있다. 프로그램 중 우연히 펼쳐진 내 성경책을 보게 되었는데 많은 메모와 밑줄 그리고 낡은 성경책 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하느님 말씀을 가까이 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누군가에게 성경의 중요성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에 기쁘고 감사하면서, 한편으론 내가 잘난척을 하듯 성경으로 과시를 […]

순교자 성월의 끝

순교자 성월이 끝났덴다. 솔직한 심정은… 시작도 안했는데 끝나버린 느낌이다. 아무래도 한국 땅에 있지 않은 탓에 (게다가 순교 흔적을 찾기 어려운 미국이다보니) 순교자 성월이 먼 나라 일처럼만 느껴진 것도 사실이다. 순교자 성월이 끝났다고 하니 아쉬운 마음에 한국의 귀한 신앙 선조들을 생각하는데, 쌩뚱 맞게도 순교자도 아닌 분이 떠올라 그분을 붙잡고 묵상을 하고 있다. ‘한국 최초의 신부’인 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