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된 인간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돈만 있으면, 능력만 있으면, 힘을 합쳐 노력하면, 원하는 건 모든 다 할 수 있다고..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다고.. 하지만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 한없는 무력함에 지쳐가고 있다.

하느님의 왜곡된 시선

가서 예루살렘이 듣도록 외쳐라. 예레 2,2 오늘 첫째 독서에서 예레미야가 선포하는 예언의 골자는, 은혜를 잃어버린 이스라엘에 대한 주님의 탄식이다. 함께 흘러가는 분위기와 환경이라는 공동체에 속해있을 때는.. 해야하는 역할과 명확한 임무가 주어져서 그것을 행하고 있을 때는.. 그럭저럭 어느정도는 내가 잘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공동체에서 떠나고 주어진 명확한 임무가 없을 때.. 사실은, 그때가 […]

어마어마한 열매

분명, 나는 좋은 땅이 아니었다. 주님의 씨앗을 내동댕이 치며 버리던 사막같은 놈이었다. 만약 씨 뿌리는 사람이, 단 한번만 씨앗을 뿌리는거였다면 내 삶에 이런 열매를 볼 수 없었을거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리고, 뿌리가 없어 말라 버려도, 열매를 낼 때까지 다시 찾아와 씨를 뿌려 주신다. 주님은 포기가 무엇인지 모르시는 분이다. 하느님이 포기하지 않는데, 우리가 포기 할 이유가 있을까.

사도 성 토마스 축일

오늘 신부님의 강론 중에 확 와 닿았던 내용.. “토마스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였지만.. 예수님의 상처로 토마스의 믿음이 치유되었습니다” 그래! 맞아! 우리의 부족함, 나약함, 아픔, 죄…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상처로 낫게 되었지!

결국은 주님의 마무리

그분은 우리의 부족함 마저도 잘 알고 계시기에 아쉬운 마음에 잔소리를 하시면서도,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신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이 쌓여야 부족함을 딛고 믿음이 자라나는 거니까.

나 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느님

관심도 없는 것들, 중요하지도 않고 신경 쓰지 않는 하찮은 것 하나까지도. 그분은 놓치지 않으신다. 그만큼 나를 바라보시고 살피시며 기억하신다. 얼마나 사랑하시길래. 얼마나 사랑하시면 그럴 수 있을까!

성체성사는 ‘일치’를 위한 것

교회의 존재는 무언가를 ‘하는 것’을 위함에 있지 않기에, 만나서 할 수 없는 것을 모두 온라인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는 무의미 하다. 전례와 같은 경신례가 중요한 것도, 그것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최상의 행위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에 있는 것은 아니니까.

Buona Pasqua!

내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그분은 알고 계신다. 내가 왜 목말라 하는지, 그분은 알고 계신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알고만 계신게 아니라, 알고있는 그것을 채워주시기 위해 찾아오신다. 천사를 보내셔놓고도, 친히 찾아오신다. 예수님은, 그렇게나 따뜻하고 아름다운 분이시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식사하는 도중에 하신 말씀입니다. 밥 먹는 자리에서 할 이야기는 아닌거 같은데, 제자들의 반응 또한 썩 만족스럽진 않습니다. 스승인 예수님이 배신자로 인해 팔아넘겨질 거라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의 관심은 그저 ‘그게 나는 아니겠지?’라며 자신의 체면만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스승이 팔려가는 거 보다, 내가 나쁜놈이 아니길 바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니.. 어쩌면 이게 인간 깊숙한 곳에 자리한 매우 자연스러운, 지독한 이기심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은?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세상에서 박해를 받아야 하는데. 예수님을 따르지 않아서, 복음을 살지 않아서, 세상에서 무시와 비난을 받는다면. 그저 내 ‘마음 편한’걸로 끝이라면, 그곳은 천국일까? 우리의 신앙은 무슨 의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