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가 아닌 함께

지긋지긋하게 힘든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거기서 오는 상처와 어려움을 벗어나서, 그냥 하느님만 바라보며 하느님과 나 단 둘만 존재하듯 평생을 살아가고 싶어 한참을 고민하던 20대 중반. 찾고 찾아 고민 끝에 도달하고픈 곳을 찾았으니 ‘트라피스트 수도회’였다. 평생을 침묵 속에 고행과 기도와 노동으로 하느님만을 향하고 싶은 마음에 어렵게 여자 수도회 장상 수녀님의 말씀에 부랴부랴 수녀님을 찾아갔다.

영어를 못하지만, 주님 안에서 안전합니다!

사랑하는 와이프도 딸도 함께하지 못하는 이곳에서, 아무도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 이 광야 같은 곳에서, 내가 온전히 의지하고 신뢰할 수 있는 분! 설령 와이프와 딸, 부모님 마저 내게서 사라진다해도 나는 살아갈 수 있지만, 주님이 없이는 결코 나는 살 수가 없습니다. 눈물을 펑펑 흘리며 고백했던 것은 바로 이 하나였습니다.

나는 지독한 예수쟁이

제가 생각해도 저는 좀 지독한 예수쟁이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부르길, 예수 중독자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나를 ‘광신도’라고 부릅니다.

더 깊이 더 깊이 더 더 깊어지길 원하셨다.

최근 2,3년동안 활동만 하면서, 적당히 자신을 돌아보며 적당한 기준에서 이탈하지 않으려고는 했지만 더 깊은 곳을 향한 갈망이 내 안에 없었던 것이 바로 문제였습니다. 하느님을 알아간다는 것에는 한계도 끝도 없기에 적당한 관계와 앎이란 것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죠. 어쩌면 이것은 ‘관계’가 아니라 ‘멈춤’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렇지만 지금 주님은 저의 삶을 부수어 버리셨습니다. 관계를 없애서 처음으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보내는만큼 관계도 계속 깊어져야 한다는 것 말이지요.

내가 신앙을 하는 이유

이제 나는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분 곁에 있고자 하는게 아님을 안다. 물론 그렇다고 그 분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나는 거룩하지도 신심이 깊지도 않다. 겸손하게 해달라는 기도 따위는 내 교만함을 감추기 위한 기도일 뿐이다. 그저 나는 더 교만해지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가 더 시급한 그런 사람일 뿐이다. 나는 그런 나를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