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금까지 예수님을 바라보는 이유. 신심이 깊고 성실하며, 믿음이 훌륭한 놈이여서가 아니라, 너무나 많은 용서를 받았기 때문.
내 고백
영어를 못하지만, 주님 안에서 안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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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와이프도 딸도 함께하지 못하는 이곳에서, 아무도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 이 광야 같은 곳에서, 내가 온전히 의지하고 신뢰할 수 있는 분! 설령 와이프와 딸, 부모님 마저 내게서 사라진다해도 나는 살아갈 수 있지만, 주님이 없이는 결코 나는 살 수가 없습니다. 눈물을 펑펑 흘리며 고백했던 것은 바로 이 하나였습니다.
더 깊이 더 깊이 더 더 깊어지길 원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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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2,3년동안 활동만 하면서, 적당히 자신을 돌아보며 적당한 기준에서 이탈하지 않으려고는 했지만 더 깊은 곳을 향한 갈망이 내 안에 없었던 것이 바로 문제였습니다. 하느님을 알아간다는 것에는 한계도 끝도 없기에 적당한 관계와 앎이란 것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죠. 어쩌면 이것은 ‘관계’가 아니라 ‘멈춤’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렇지만 지금 주님은 저의 삶을 부수어 버리셨습니다. 관계를 없애서 처음으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보내는만큼 관계도 계속 깊어져야 한다는 것 말이지요.
내가 신앙을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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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분 곁에 있고자 하는게 아님을 안다. 물론 그렇다고 그 분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나는 거룩하지도 신심이 깊지도 않다. 겸손하게 해달라는 기도 따위는 내 교만함을 감추기 위한 기도일 뿐이다. 그저 나는 더 교만해지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가 더 시급한 그런 사람일 뿐이다. 나는 그런 나를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