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마태 25,3-4)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의 구분은 그들의 충실성에 있지 않다. 열 처녀 모두 신랑을 ‘기다렸고’, 열 처녀 모두 기다리다 ‘잠들었다’. 잠들지 않고 충실히 깨어 기다린 이들이 슬기로운 게 아니라, 등과 함께 ‘기름을 가지고 있었느냐’에 따라 구분되는 거다.
기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본문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바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기름이라는 ‘준비’에 있다. 여러 해설들 가운데에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움과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음을 이 본문과 연결짓는 것이 가장 와 닿는다.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우리는 성사적으로 모두 동등한 ‘등’을 지니고 있다. 내 의지와 노력과 상관 없이 성사적 은총에 의해 등에 불은 늘 켜져있다. 하지만, 때때로 이 놀라운 은총 때문에 착각하곤 한다.
‘음.. 불 잘 켜져있네.. 잘 하고 있구만 그려..’
하지만 신랑이 온다는 외침에 따라 정신을 차리고 나면 ‘등의 시간’은 끝이 나고, ‘기름의 시간’이 다가온다. 팔팔하던 불이 갑자기 시들기 시작하고, 불을 다시 지피기 위해 호들갑을 떨게 된다.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기름은 영혼을 끌어 빚을 내도 구할 수가 없다. 똑같은 신자라고 할지라도, 교회에 모여 눈누난나- 웃을지라도, 잠들고 깨어나면 깨닫게 된다. 기름이 준비된 사람이랑 암만 친하더라도 니 기름이 내 기름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무엇에 의해 지금 내가 숨을 쉬는가. 나는 지금 무엇 위에 집을 짓고 서 있는가. 십 년을 성사에 의해 숨을 쉬어왔지만, 예수가 누군지 어색한 사람이 있다. 예수님을 만나면 뭔 말을 해야할지 난감하다면, 바로 기름이 없는 사람이라고 봐도 될 듯 하다.
그렇다. 내가 주님과 친하다면 걱정될게 뭐가 있을까. 문제는, 그닥 친하지 않은거 같다고 느끼는 경우다.
기름, 여러 의미로 묵상할 수 있겠지만..
하느님과의 추억…이라고 지어본다면, 좀 더 방향을 잡기가 수월하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