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옷을 입은 무리들처럼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마태 5,11

 

정말 그랬다!

모욕을 듣고 무시를 당하고 박해를 받는 것,
이게 무섭고 두렵고 화가 날거 같은데… 신비롭게도 이게
기분이 좋고 행복하게 한다.

뭐랄까.

‘아 나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구나..’라는 확인을 체험한달까?
그래서, 신앙을 감추기 보다 더욱 더 드러내게 된다.

그런데 이게, ‘예수님 때문에’가 아니라
내 삶의 모습 때문에 모욕을 들으면,
행복하기 보다 위축되고 작아지고 부끄러워 숨게 된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내 신앙은
사람들 앞에서 숨어버린다.
십자가는 내 삶에 드러나지 않는다.

 

박해를 받고 순교를 당하길 꿈꾸던 때가 있었다.
예수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다가
거절 당해서 목숨을 잃어버리는 것이 내 마지막이길 바랬었다.

하지만 정작 선교지에서 질병으로 죽을 수 있는 처지가 되자
영광스러운 죽음은 커녕, 삶에 대한 집착만 있더라.

지금도 여전히 순교에 대한 마음이 없진 않지만,
그때보다 지금의 나는 ‘죽음’이 두렵다. 하지만 동시에
삶에 대한 집착은 이제 그리 크지는 않다.

문제는 삶이다.

예수님이 드러나는 삶이라면, 감추지 않고 신앙이 드러날텐데
내 삶이 그러지 못하니까 신앙이 당당하지 못하다.

이 상태를 만족할 수 없으니,
자신과의 싸움이 치열할 수 밖에.

여전히 나는,
직장에서든 어디에서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
내가 크리스챤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내 삶이 당당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사화 안에서 스스로 족쇄를 걸어놓는거다.

‘나는 크리스챤이다. 사람들이 알고 있다. 크리스챤 답게 살자.’

그리고 이렇게 당당히 밝히고 나면,
반드시 언젠가는 조용히 정체를 밝히며 다가오는 사람이 있다.

‘냉담자’

다가오는 이들에게 도움의 문을 열어두기 위해,
그리고 사회 안에서 내 신분을 밝히고 족쇄를 걸기 위해.
내 삶은 떳떳하지 않지만, 떳떳해지기 위한 투쟁의 방편으로
나는 내가 크리스챤임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타이틀을 내놓고 거기에 나를 끼워맞추는게 아니라,
밝히지 않아도 누구나 내가 크리스챤임이 드러나는 삶이었으면 좋겠다.

어린양의 피로 깨끗해진,
흰 옷을 입은 무리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