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술함을 기적으로, 끝까지 책임지시는 주님

 

거기에는 유다인들의 정결례에 쓰는 돌로 된 물독 여섯 개가 놓여 있었는데, 모두 두세 동이들이였다.
요한 2:6

오늘 복음에선 이 ‘정결례를 위한 물독’에 유난히 시선이 머물렀다. 유다인들은 식사 전에 손을 씻는 정결례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정결례를 위한 물독은 중요한 거다. 그런데 예수님은 혼인잔치에서 다 떨어진 포도주를 그 물독에다 만드셨다. 다른 물독도 아닌 하필 정결례를 위한 물독에.

포도주는 계약을 의미한다. 그리고 또한 죄를 씻는 어린양 예수님의 피를 의미하기도 한다. 별것 아닐지 모를 ‘정결례에 쓰는 물독’은 나름 큰 의미를 담고 있는 듯 하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 ‘매번 물로 깨끗히 씻어야 하는’ 정결례가 아니라. 그분의 피를 통한 완전히 정결해질 수 있는 새 포도주로 새로운 계약을 드러내셨다. 사실 이것이 ‘첫 기적’의 참 의미가 아닐까.

당시 유다인들의 혼인잔치는 7일 가량 이어졌다고 한다. 초대받은 사람만 올 수 있다곤 하지만, 7일간 잔치가 열리는데 포도주가 떨어질 정도면 사람들이 꽤 즐거웠던 모양이다. 아니면 신랑의 준비가 허술했던가.

우리 삶의 허술함, 나약함, 때로는 위기와 같은 순간이. 하느님의 기적이 계시되는 놀라운 통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그런 순간들과 계시를 이어줄 매개체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믿음을 지닌 이들’의 삶이 아닐까. 복음 속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그 삶의 모범을 본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이 대목에서 ‘마리아의 중재가 하느님의 때를 앞당긴다’라는 해설을 꺼내선 안된다. 마리아의 중재는 ‘그리스도의 뜻대로 행하라’는 것 외에는 없다. 바로 이 모범이, 오늘날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하는 태도인거 같다. “무엇이든 예수님의 가르침 대로 하라”

주님의 가르침이 아닌 다른 것으로는,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없다. 시련의 시기, 고통의 시기, 수용하기 어려운 인간 삶의 고뇌들 가운데에서 믿음을 지닌 이들이 살아내야 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가르침 대로 행하는 것일게다.

잔치의 주최자인 신랑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본인이 엄청난 실책과 실망을 끼쳤을지 모르고 있었으며, 하객들 또한 전혀 몰랐다. 다만, 그것을 목격한 이들에게는 ‘믿음’이 더하여 졌다는 것.

내가 그분의 뜻을 따른다고 해서, 세상이 갑자기 확 달라지진 않는다. 세상은 뭔 일이 있었냐는 듯이 원래 가던 대로 흘러 간다. 하지만, 그 행함의 결과는 나에게 믿음을 더해 준다. 그리고 그 믿음은 옛 계약이 아니라 새 계약으로 나를 초대한다. 이것이 바로 그분과의 인격적 교제이다.

또 한편! 말이 물독이지 그당시 돌로된 물독은 항아리처럼 들어옮길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커다란 돌의 가운데를 파서 구멍을 만들어 그 안에 물을 담았다 한다. 포도주를 다 퍼 마시고는 정결례를 위해 다시 사용할 수 있었을까? 아마 그거 닦는 것도 일이었겠다 싶다. 어쩌면 예수님은 나중에 일꾼들에게 욕 먹을지도 모른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좋은 일 하고도 욕 먹을 수 있다.

성경의 두세동이를 환산할 때, 물독 하나에 80~120리터 정도 담을 수 있었을거라고 한다. 평균 100리터씩 여섯 동이로 총 600리터의 포도주. 1주일간 충분히 마실 수 있었겠지? 오늘 하루만을 위함이 아닌, 전체를 고루 살피시는 주님의 손길. 그분은 끝까지 책임지신다. 우리 주님은 그런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