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체성사는 ‘일치’를 위한 것

코로나 때문에 전례가 무기한 중단된 이후, 지난 달 중순부터 25명 제한이지만 조건부로 전례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진정되지 않는 미국 상황에서, 이 지역 교구장님이 신자들의 영적 양식을 위해 과감하게 빠른 오픈을 도전하신 덕분이다.

전례에 참석할 수 없었던 두달 가량의 시간동안, 주일마다 유튜브로 생중계 되는 미사를 ‘구경’하느라 너무나 답답했다. 뭐.. 이 또한 없는 거 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겠지만, <솔직히> 오히려 화면으로 미사를 보고 있는 것이 더 답답하고, 특히 성찬례를 보고 있노라면 때론 화가 나기도 했다. 영상으로 미사를 볼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하시는 분들을 보면서, 내 마음은 참으로 꼬이고 꼬였구나-라는 걸 발견하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화면 속의 전례는 내게 어떤 은총도 감동도 주지 못하였고, 그저 그리웠던 신부님의 강론을 들을 수 있다는 한 가지 유익만으로 위안을 삼았을 뿐이었다. 정말이지 나는 참 삐딱하다.

그렇게 미사 제개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신청하여 참석했고 3주에 1번 가능하던 것이 이제는 격주로 참석이 가능해지면서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 쇼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 마저도 언제까지 가능할지는 모르는게 현실..)

온라인을 활용하여 대체될 수 있는 영역이 있지만, 모든 것을 대체할 수는 없다. 시기가 이러하니, 영적 유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 방법을 고민해야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일 뿐이다.

교회의 존재는 무언가를 ‘하는 것’을 위함에 있지 않기에, 만나서 할 수 없는 것을 모두 온라인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는 무의미 하다. 전례와 같은 경신례가 중요한 것도, 그것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최상의 행위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에 있는 것은 아니니까.

혁신, 혁명, 개혁, 진보, 나는 이러한 가치들이 우리의 삶을 발전시킨다고 믿는다. 하지만 모든 것을 새롭게, 또 빠르게 만들고 변화시키려다보면, ‘왜(WHY)’라는 본질 보다는 ‘무엇(WHAT)’이라는 결과에 집중하게 되곤 한다.

미디어를 통한 복음화에 사명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그것을 제대로 알려준 것 같다. 교회는 모임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합일을 위한 존재라는 것…

주일에 왜 미사에 참례해야 하는지.. 기도하고 성경을 읽어야하는 이유는 너무나 명확하다. 그분을 사랑하기 위해. 그분과 하나되기 위해.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1코린 10,16)

그분의 피에 동참하는 것..
그분의 몸에 동참하는 것..

십자가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것..
교회의 지체들과 하나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