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함, 의로움을 드러내 보이려는 마음, 그것으로 나를 위장하려는 마음 뒤에는 내 연약함을 감추고픈 마음과 ‘나는 너와 다르다’라는 것에서 위안을 얻으려는 마음이 숨어 있습니다. 나는 진리를 알고 정의를 추구하며 죄를 피하려 노력하고 올바른 것을 위해 투신하고 있다고… 이는 마치 ‘나는 저 죄인과 같지 않으니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던 바리새인처럼, 다른 이의 연약함을 비난하며 자신의 의로움을 부각시키는 그릇된 의로움입니다. 아니, ‘사랑’이 없는 곳에 의로움도 거룩함도 구원도 있을리가 만무하겠네요.
그런 마음이 여전히 제 속에 디글디글 굴러다니고 있음을 봅니다. 속상함을 넘어 이젠 지긋지긋하네요. (지겹다 지겨워…)
자주 이런 상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이 시대에 오셨더라면, 성당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기도하며 교회법과 교리와 십계명을 잘 지키고 봉헌금과 교무금을 잘 납부하며 교회의 장상에게 순종하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훌륭한 신자들에게 예수님은 먼저 찾아가셨을까?’
어쩌면 그분은, 교리는 물론 주일 조차 어기고 봉헌과 교무금도 내지 않으며 마지막 고해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그런 ‘냉담한 이들’을 먼저 찾아가지 않으셨을까? 세리와 창녀들을 찾아가 같이 한잔하며 밥을 먹은 것처럼, 죄인들이 디글거리는 곳으로 먼저 가시지 않으셨을까?
“저는 하느님을 위해 봉사도, 봉헌도, 신앙도, 실천도 열심히 했는데.. 왜 제가 아니라 저들에게 먼저 가십니까?”라고.. 많은 이들이 속상해 하며 예수님께 물음을 던질테지만, 예수님은 이렇게만 대답하실 거 같습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르 2,17
어쩌면 저는, 병든 죄인이면서도 그걸 모르고 ‘저들과 다르다’라고 착각하며 ‘건강한 이’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자비가 너무 절실히 필요한 죄인이고 친근한 형제일 뿐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