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마르 2:24
‘해서는 안 되는 일’. 바로 이것이 율법의 본질을 놓치고 잘못 해석한 율법주의자들의 큰 함정이다.
’해야 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 사이에서 ‘안 되는 일’에 더 초점을 두는 것, 사실 그것이 더 쉽고 편하고 ‘명확한 길’이기 때문에 여기에 집중하려는 유혹은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미워하지 말라’는 명령은 행위가 명확하지만, ‘사랑하라’는 명령은 행위가 명확하지 않다. 당장 미워하는 사람이 없다면 ‘미워하는 죄’를 짓지 않은 거지만, 사랑하라는 명령 앞에서 당당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능동적인 행위 보다, 부정 행위를 금하는 것이 행위를 판단하기가 쉽기 때문에 이쪽에 집중하는 것이 마음이 편한건 당연한 거다.
그러나, 그것에 집중함으로 인해 생기는 많은 오류 중 가장 위험한 것은, 나와 타인을 비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움이라는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있을 수 있다. 내가 범하지 않았고 또 앞으로도 범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 죄에 대해서는 자유롭다고 생각하기 쉽다. 문제는 그런 여유로운 태도가 다른 이를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거다. 아니 적어도 ‘나는 달라’라고 구분 지을 수 있게 된다. ‘적어도 나는 저러진 않았다’라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이었나!
그리스도교 안에서 유난히 ‘동성애’에 대한 비난과 비판이 심한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다수의 사람이 ‘동성애’와 연관이 없기 때문일 거다. 나 혹은 내 주변에 동성애와 연관된 사람이 적기 때문에 그 죄로부터 스스로 자유롭다고 여기기에, 다른 이를 단죄하고 판단하는 일이 다소 쉬워진다. 반면에 거짓말이라는 죄 앞에서는 아무도 심각한 무게를 두고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건 너무나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나머지 ‘죄’라고 생각하지 않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아마, ‘혼전성관계’에 대해서도 동성애와 똑같은 무게를 가지고 대하는 사람은 (적어도 요즘 세상엔) 드물거다. 동물 안락사 문제가 크게 이슈가 되는데 비해, 낙태 문제에 대해선 ‘그럴 수 있는 일’이 되어버린 무서운 세상 아니던가.
‘해서는 안되는 일’에 집착했던 바리사이와 달리, 예수님은 언제나 ‘해야 하는 일’에 초점을 두셨다. 예수님은 율법의 폐기가 아닌 완성을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그 완성은 곧 ‘사랑’이라는 ‘해야 하는 일’에 완벽하게 초점을 두게 만드는 것이다. 오늘날의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해서는 안되는 일’에 초점을 두는 경우가 참 많다.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성찰하기 보다, ‘하면 안되는 나쁜 일’을 했는지를 성찰하는 것에 익숙해지다보면, 그것들만 피하면 신앙인으로서 할 도리를 잘 마쳤다고 착각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참된 그리스도교 신앙은 아니다. 내 도리만 지키면 된다는 것은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난 일이다. 오늘날의 매우 위험한 유혹은, 신앙이 자기 만족이나 자기 위안을 위한 도구로 변질되어가는 것이 아닐까.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세상에서 박해를 받아야 하는데…
예수님을 따르지 않아서, 복음을 살지 않아서, 세상에서 무시와 비난을 받는다면..
그저 내 ‘마음 편한’걸로 끝이라면, 그곳은 천국일까?
우리의 신앙은 무슨 의미일까?
+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
무엇을.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늘 답답하고, 막막합니다.
교회로 부르시고,
이 신앙으로 부르셨으니,
그 신앙의 삶을 살아가도록,
끝까지 따라갈 수 있도록,
붙잡아 주소서.
‘나는 가톨릭신자입니다.’라는 고백을.
가톨릭에서 세례를 받아 교적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고자 따르는 사람이라는 의미로서
당당하게 고백하는 날은 언제 올까.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 (시편 5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