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으로서의 삶

이것이 현실인지 혹은 나 혼자만의 착각인지 잘 알 수 없지만. 종종 벽같은 것이 느껴질 때가 있다. 미국이란 나라는, 원래 정착하고 있던 이들을 몰아낸 이민자들이 차지하여 세운 나라이기에, ‘민족국가’의 개념보다 ‘다양한 이들이 섞여사는 나라’라는 개념에 더 가깝기는 하지만, 그래도 백인 사회가 크고 영향력이 있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물론 동네에 따라 이런 구분이 또렷하여 차별이 잘 나타나는 곳이 있는가 하면, 그런 구분이 거의 없다 싶을 정도의 동네도 있지만. 노골적으로 차별을 한다거나 하는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동양인인데다 영어까지 못하는 입장에서는 ‘무리’에 낀다는 게 버겁고 때론 벽이 느껴질 때가 있다.

어떤 면에선 내가 극복해야 할 몫이 분명히 있긴 한데, 한편으로는 ‘같은 조건 일 때, 동양인이라서 배제될 수 있는 가능성’도 확실히 존재한다는 걸 동양인들만 안다. 그럴 때마다 느껴지는 답답함은, 과연 내가 이 백인들 사이에서 선교사로서 개척하며 투쟁해 나아가야 하는 삶을 얼마나 버티며 나아갈 수 있을까 두려울 때가 있다.

뭐든 마찬가지지만. 이 부름에 대한 확신이 내 안에 없다면, 나은 점이라곤 뭐 하나 없는 내가 이렇게 버티며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거다. 한국이었다면, 그냥 하던거 계속 했으면 됐을테지만, 굳이 ‘더 힘든 삶을 통해 하느님을 더 의지하고 그분을 더 알고 싶다’는 무식하고 막연한 마음으로 선택한 타지에서의 이 삶이, 각오했음에도 한숨에 하늘만 멍하니 보게 될 때가 있다.

바로 이 시점. 멍하니 바라보는 답답한 시점이, 내가 갈망했던 ‘하느님 외엔 의지할 곳이 없는 상태’ 즉 응답의 때다. 고요함 가운데, 그분의 목소리만 기다린다. 그리고 이방인으로서 느끼는 이 고독과 답답함이, 바로 이방인들을 향한 하느님의 마음을 느끼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이사 42:6-7

‘너와 같은 이들을 위해 너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