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전 일이다. 열성을 다해 희생하기로 작정하고 앞장 서 봉사하던 때가 있었다. 공동체 센터에서 공동생활을 시작하던 때였는데, 매우 사소하지만 늘 같은 문제 때문에 불만이 말도 아니었다. 바로, ‘사용한 컵을 치우지 않는 문제’였다.
‘손이 없나 발이 없나, 물을 마셨으면 컵을 씻어 놓고 가거나 하다못해 잘 보이는 곳에 두고 가야할거 아니야! 보물찾기도 아니고 컵을 왜 이런데다 두고 가는거지?’
꾹꾹 참고 치우기를 얼마나 했을까. 어느 시점이 되자, 봉사자들을 볼 때마다 누가 컵을 안치우고 가는지 감시하듯 지켜 보게 되었다. 참고 참았지만 더는 참을 수 없는 분노 때문에, 정수기를 없애 버리자고 건의를 할 작정이었다. 신부님과 공동체 리더들에게 정식으로 이야기 하기 전에, 리더인 형님에게 하소연하듯 사석에서 썰을 풀어냈었는데, 그 형의 반응은 참 의외였다.
“그럼, 너도 치우지 마.”
이게 말이야 방구야.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니 공동생활을 하며 센터 관리를 하는 사람들이 하는건 당연한건데, 그 마저 안하면 누가 하라고…? 결국 이런 문제들을 신부님과 공동체 리더들과 같이 정식으로 논의를 했는데.. 오히려 ‘너희는 왜 여기서 공동생활을 하는거냐? 못하겠으면 하지 말고 나가라.’라며 문책을 받았더랬다. 매우 기분이 나쁘고 섭섭하고 화가 났었다. 한동안 이 충격에서 나오지 못하고 조배실에서 살다시피 했었다.
‘주님, 내가 잘못한건가요? 어지러놓는 사람들, 기본이 안된 사람들이 잘못한거잖아요!’
그때 내가 묵상했던 물음은,
“너는 그들을 사랑하느냐?”였다.
누가 잘못했는지는 일단 중요한게 아니다. 기본을 지키지 못한 사람의 몫은 그 사람의 책임이고.. 나에게 중요한 건, 그것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사랑이 아니라 비난과 미움과 분노였다는 것이다. 사랑할 수 없고 오히려 죄를 짓고 있는 내 자신에게, 공동체를 통해 하느님이 가르쳐 주신 것은, “사랑할 수 없다면 금하라”는 것이었다. 결국 이 문제의 해결책은, 나의 사랑 없음과 오만함을 회개하는 것이었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마르 9,43
아무리 필요하고, 중요하고, 옳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행함에 사랑을 추구하기 보다는, 비난하고 욕하고 단죄하고 분노하며 죄를 짓고 있다면 그것은 선행을 위한 기회가 아니라, ‘죄 지을 기회’일 뿐인거다. 그것은, 차라리 잘라 버리는 편이 더 유익하다는 것.. 물론, 잘라 버리기 보다는 사랑할 수 있게 되는 편을 더 지향해야할테지만.
다 잘라 버려서 아무것도 없는 인생이 되지 않기 위해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사랑하기 위해 투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