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기도한 것은 이 아이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드린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아이를 주님께 바치기로 하였습니다.
1사무 1,27-28
한나가 사제인 엘리에게 말한 바. 그녀는 하느님께서 청원에 응답하신 바를 알았으며 그에 감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감사의 표시로 응답의 결과인 아이를 도로 주님께 바쳤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기도를 들으시고, 그 모든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우리가 드려지는 모든 기도는 단 한마디도 허투로 쓰여지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성실하시고 자비하셔서 모든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응답이란, 기도에 대한 반응이지, 원하는 대가를 그대로 받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느님의 응답을 알아 채는 것은 늘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유지해야만 가능합니다. 그 반응에 감사하는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럽고 당연한 태도이며, 많은 경우 여기까지는 큰 어려움이 없이 이어집니다.
문제는, ‘도로 바침’입니다. 기도의 태도가 여기까지 이어지기가 사실 쉽지가 않죠. 내가 바란 것을 주님께서 들어주셨으니 감사한 것까지는 자연스럽지만, 감사의 표시로 주님께 돌려 드리는 것은 익숙하지가 않습니다. 아마 많이들 그러하겠지요.
받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은 정말 자주 갖는거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족하다 여기며 살아갑니다. 왜 돌려드릴 수 없는걸까요? 왜 그런 생각까지 가지 않을까요? 내가 받은 것이 ‘기도의 대가’로서 정당하다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렵네요. 내가 주님께 돌려드려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아니, 참 많네요. 과연 나는 드릴 수 있는지…
한나라는 여인은, 전통적으로 신약의 마리아에 대한 예언적 루트로 해석해 왔습니다. 본문 내용 뒤에 이어질 한나의 노래는, 신약에서 마리아의 노래 ‘마니피캇’의 모델이기도 하지요. 성경에서 한나의 존재는 사무엘을 낳은 어머니로서의 역할로 그쳐 보이지만, 그녀의 충실함과 겸손을 통해 이스라엘 역사에 중요한 예언자 사무엘이 세워질 수 있었음을 볼 때, 기적적인 한 인물이 짠! 하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인물들의 행위들이 위대한 역사의 조각처럼 모여서 놀라운 판을 짜는 것이 하느님의 섭리인 듯 합니다.
나의 마음과 행위가 그저 삶의 작은 에피소드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루실 역사의 귀한 조각이라고 본다면, 나의 소홀함은 그분의 뜻을 어긋내는데 일조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로마 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