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움직여진 의지의 명령에 따라,
하느님의 진리에 동의하는 지성적 행위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155항
이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명언 중 하나다. 그렇다. 신앙은 은총이 선행되어 그에 따라 움직이는 의지로 이어지는 행위이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세계 어디든, 신앙을 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그런 그들은 모두 어떤 마음으로, 어떤 동기로 인해, 어떤 목적을 갖고 신앙을 하고들 있을까? 궁극적으로 이 물음에 대한 전형적인 모범 답안을 교리에서 찾을 수 있다.
하느님을 믿고 섬기며 구원을 얻어 영원히 살기 위해서…
맞다. 분명히 옳다.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목표임에 동의하고 희망하며 간절히 원한다. 그것이 그리스도교의 신앙이다. 그런데 이 궁극적인 지향점 안에서, 각 개인의 삶 속에 구체화된 신앙의 동기들은 조금씩 다를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 내가 나누고자 하는 것은, 내가 신앙을 하는 지극히 개인적으로 이유에 관한 것이다.
이성적으로 납득이 되어야만 받아들일 수 있는 내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이 추상적인 (신이라는 영적) 개념이 아니라, ‘실존하는 절대적 존재’임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추상적인 ‘개념’이었던 신(하느님)의 존재를 인격적으로 경험하는 영적 체험들이 내 의지를 꺾어놓았다. 나는 이것이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야기 한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해석한다. 그 은총은 나의 완고한 의지를 움직여, 신앙의 진리에 동의하고 그것을 믿고 따르도록 이끌었다.
어느덧 시간이 꽤 흘렀다. 나는 ‘있기 때문에 믿는 행위’라는 단순한 차원을 넘어서야 했다. 그리고 이를 넘어서게 되었다. ‘존재하기에 존재한다고 믿는다’는 기초적인 믿음을 넘어서서, 신앙이 나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이의 시각에서 나를 바라볼 때, 나는 자주 ‘열혈신도(광신도), 미친놈, 예수쟁이, 외골수..’로 비춰진다. 간혹 사람들이 나에게 그렇게 말할 때도 있지만, 내가 다른 이의 입장에서 나를 볼 때 확실히 나는 지나치게 신앙에 목을 맨다.
예전엔 내가 거룩함을 갈망하는 그런 순수함을 지녔기 때문에 그러하다고 착각했다. 세심증에도 빠지고, 거룩함에 집착하며 속되고 더러운 것을 구분짓고 멀리하려 하기도 했다. 마치 그것이 죄인 것처럼, 이 세상이 악의 구렁텅이인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그런지 아닌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제 중요한 것은 나는 거룩하지도, 깨끗하지도 않은 죄많은 인간이며, 죄와 어둠의 영향과 지배 아래 놓은 비참한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12,46
하느님은 빛이시다. 빛이신 그 분 앞에 다가가면 갈수록 내 안에 어둠은 점점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났다. 이제 나는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분 곁에 있고자 하는게 아님을 안다. 물론 그렇다고 그 분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나는 거룩하지도 신심이 깊지도 않다. 겸손하게 해달라는 기도 따위는 내 교만함을 감추기 위한 기도일 뿐이다. 그저 나는 더 교만해지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가 더 시급한 그런 사람일 뿐이다. 나는 그런 나를 안다.
그 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더 만나고 싶고 곁에 있고 싶은 것만이 아님을 안다. 사랑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것보다도 나에게 시급한 것은 그 분의 사랑이 내게 필요한 것임을 안다. 세상 다른 사람들처럼, 먹고 사는게 종교보다 더 시급하다고 생각할 수도 없다. 내 믿음과 신심이 두터워서? 아니다. 먹고 사는 것보다 더 시급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분이 너무나 필요하다. 사랑해서 곁에 두고 싶은 필요가 아니라, 그 분이 없으면 언제 어떻게 망가져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불쌍하고 연약한 죄 많은 한 사람이니까.. 그렇지만 그런 나에게도 꿈이 있다. 내 입으로 꺼내기엔 너무나 죄스러울만큼 자격은 없지만, 언젠가 두어번 꺼낸 적이 있었던 그런 꿈.
그것은 바로, 내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없을만큼 그 분을 사랑하고 싶다. 아직은 나에게 너무나 먼, 아니 어쩌면 허황된 꿈일지 모를 그런 꿈이지만. 꿈은 크게 가져야한다더라. 내 꿈은 이마만큼 미친듯이 크다.
아주 오래 전, 내가 내 의지로 신앙을 선택하기 전 십대 시절에, 울 엄니께서 내게 자주 해줬던 ‘이상한 말’을 나는 명확히 기억한다.
“엄마는 우리 아들이, 엄마랑 아빠보다도 하느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 당시에는, 대체 뭔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만큼 너무 어렸던 나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제 내가 내 딸을 향해 그런 마음이 생겼으니까. 지금은 비록 알아듣지 못하지만, 종종 딸 아이의 귀에 대고 속삭여주고 있다.
“아빠는 우리 딸이, 엄마랑 아빠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이것이 우리 신앙의 이유가 아닐까. 그 사랑은 내 힘으로.. 아니, 나같은 사람은 할 수 없으니까. 그렇기에 그 분이 너무나도 필요한, 신앙의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