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과 부르심은 세트메뉴!

최근 독서에서는, 예수 부활 이후의 사도들의 여정을 선포하고 있다.
특히 이번 주일의 첫째 독서에서 나온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첫 선교여정은 매우 흥분이 되는 대목이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페르게에서 더 나아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았다.
(사도 13,14)

안티오키아(시리아) 교회의 일원인 이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교회로부터 선교사로 파견된다.

선교사로 파견된 그들은
키프로스라는 섬에서 첫 복음선포를 시작한다.
그곳에서 거짓예언자를 만나지만
성령의 힘으로 거짓예언자는 벌을 받는다.

그 다음 방문지는 피시디아 지역에서도
회당을 찾아 선포하였고 많은 이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는데,
이곳에서도 그들을 시기하는 이들이 나타나 박해를 받는다.

복음을 전하는 곳 마다 괴물들이 나타난다.
마치 게임을 하는 것 마냥, 모험은 순탄하지 않다.

복음을 선포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어려움을 겪지 않았을 거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박해와 고통이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삶이지 싶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바로,
성령의 이끄심이었다.

예수님을 광야로 내던진 것도 성령이었고,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선교사로 지명한 것도 성령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갈 곳을 인도하신 것도 성령이었다.

박해와 고통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시지만,
성령의 뜻대로 살지 않는다면 박해와 고통을 피할 수 있다.

어떻게 해야할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 받았다.

각자의 소명에 따라,
어떤 이는 직무사제직을, 어떤 이는 봉헌생활을,
어떤 이는 혼인으로, 어떤 이는 독신의 삶으로..

첫번째는,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을 식별하는 것이며
그 이후에는 소명의 본질에 충실히 사는 것이다.

선교사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박해를 받는 일은 없었겠지만…
과연 그 삶이 성소에 충실한 삶일까?

미사를 봉헌하지 않는 사제는 없어야 한다.
서원을 하찮게 여기는 수도자는 없어야 한다.
가정에 충실하지 않는 부부는 없어야 한다.

그 뜻대로 살아갈 때,
우리는 순탄한 것만이 아니라
박해와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께서는 드러나지만 드러나지 않게 일하신다.
늘 함께 동행하시면서, 우리의 길을 가르쳐 주신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
자신의 성소를 충실히 또 당당히 살아낼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신다..
응답버튼을 누르고 그분의 소리를 들어보자!

오늘도, 고고싱!
with the Holy 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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